내려놓음과 해탈 · 심성과 수행
심성과 수행 · 내려놓음과 해탈
짧은 글 9편
《내려놓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긴 뒤 남은 길을 어떻게 잘 걸어갈까?
비극을 만나면 자신이 놓도록 해야 한다. 비극은 결국 되돌릴 수 없다
비극이 생겨도 길은 계속 가야 한다. 놓을 수 있어야 잘 걷고 진정으로 멋진 삶을 산다.
누구도 자기 삶이 멋지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한평생은 아주 길고
한평생은 아주 짧다
비극인지 멋진 삶인지
온전히 네 마음가짐에 달려 있고,
네 사고가 네 운명을 결정한다.
《열반과 거듭남》 다시 시작하려면 먼저 눈앞의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할까?
나는 부처에게 물었다. “열반과 거듭남은 무슨 뜻입니까?”
부처가 말했다. “열반은 ‘생겨나지 않음’, ‘함이 없음’, ‘움직임이 없음’이고 거듭남은 너의 인이다. 무엇 때문에 태어나고 무엇을 위해 죽느냐? 생사가 무의미하다면 왜 열반하고 거듭나려 하느냐? 모든 것은 네 마음에 따라 생기거나 생기지 않고, 행하거나 행하지 않으며,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는다. 네가 이 질문을 했다는 것은 사실 답이 없다는 뜻이다.”
부처는 없으며 부처가 말을 하지도 않는다. 부처는 깨달음이고 자기 자신이다. 자신만이 자신의 주인이다. 매분 매초를 소중히 여겨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 열반과 거듭남이다.
《밍산 장로의 임종 가르침》 삶의 무상함 앞에서 수행을 마음 정화와 사람 대하기에 어떻게 실천할까?
무상함이 닥쳐야 환화한 몸임을 안다 그대에게 염불을 권하니 생각마다 탐욕과 분노를 쉬게 하라
가을 물의 물고기 자취, 긴 하늘의 새 흔적. 어디로 가느냐 물으면 청정한 땅에 왕생한다. 깨달아 미혹하지 않으니 생겨남에는 반드시 소멸이 있다. 서원을 타고 다시 오리니 어찌 슬피 울겠는가.
우리 부처의 유훈은 계율을 스승 삼고 계율에 의지해 정을 닦으며 정으로 혜를 내는 것이다. 계·정·혜로 고통을 알고 그 원인을 끊으며 소멸을 바라 도를 닦아 해탈로 향한다.
스스로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의 가르침이다. 각 종파는 길은 달라도 귀착은 같으니 이것을 믿든 저것을 믿든 신앙은 자유다.
서로 존중하고 문호를 세우지 않으며 육화로 다투지 말고 단결하여 도와라.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하고 오계와 십선, 사섭과 육도로 차츰 수련하라.
《놓기》 번뇌를 놓으려 할 때 내면에 이미 앞으로 나갈 힘이 있는가?
마음을 내고 마음을 닦아야 한다. 마음을 내지 않으면 번뇌를 다스릴 수 없다. 거슬러 배를 젓는 것과 같다. 물살의 힘이 커서 위로 힘껏 젓지 않으면 제자리에 머물 수도 없고 반드시 떠내려간다. 위로 향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내면 지혜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서 망상과 번뇌를 놓고 싶다고 놓을 수 있겠는가?
《갇힘》 나를 가둔 일은 마음이 다른 시각을 갖기를 기다리는 것일까?
벗어나지 못하면 수많은 생각에 묶인 지옥 같고 벗어나면 바다와 하늘처럼 넓게 풀려난 천국 같다.
《소박함과 평범함》 수양은 꼭 특별해 보여야 하는가, 평범한 생활 속에도 숨을 수 있는가?
큰 수양을 이룬 이는 세속과 평범함에 들어간다. 괴상하게 굴지 않고 유별나지 않으며 남을 오싹하게 하지 않는다.
내면으로 체득하는 법이 어찌 글의 풀이에 있겠는가? 부처 말투만 쓰면 이상하지 않은가? 소박함이 도이고 평범함이 부처다.
《해탈과 소요》 해방을 추구하면서 수행의 겉모습에 다시 묶이지 않았는가?
부처를 배우는 많은 이는 얼굴도 부처 같고 온몸에 불기운을 풍기며 입에는 부처의 말만 가득하고 도인인 체한다. 나는 멀리하려 한다. 이미 불교의 “능구렁이”이자 “불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진짜 수양자는 수양한 모양을 꾸미지 않는다.
불교 용어만 말하고 지구의 말은 하지 않는다. 장엄한 죽은 표정으로 방에 들어와 공기를 오염시키고, 잡념 없는 “공”의 모습을 꾸며 잡념을 분별해 내보낸 뒤 다시 “공”이라는 잡념의 세계로 들어간다. 잡념의 밧줄을 풀고도 “공의 형상”의 밧줄에 묶여 분별심에 들어간다. 한 글자 “꾸밈”이다!
큰 수양자의 숨은 비결은 세속과 연결되고 공의 형상 없이 참되고 크게 자유로운 것이다!
해탈이야말로 부처를 배우는 것이고 소요야말로 도를 닦는 것이다
《경험이 현재를 지배하게 두지 마라》 과거를 놓는다는 것은 과거 경험을 반드시 부정해야 한다는 뜻인가?
놓아 버림은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더 이상 현재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를 제자리에 두고 계속 행동하라》 바꿀 수 없는 과거와 아직 행동할 수 있는 오늘을 어떻게 나누어 둘까?
되돌릴 수 없는 일은 제자리에 잘 두고, 아직 행동할 수 있는 부분은 다시 가져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