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닦기와 깨달음 · 심성과 수행
심성과 수행 · 마음 닦기와 깨달음
짧은 글 12편
《수행과 깨달음의 정의》 수행과 깨달음은 각각 어디에 힘을 기울이며, 타율에서 자각으로 어떻게 나아가는가?
수행과 깨달음
부처
깨달음
수행은 부처가 되기 위한 것으로 구함에 있다
깨달음은 본성을 밝히는 것으로 앎에 있다
수행은 행동으로 본성을 다스린다
깨달음은 본성으로 행동을 펼친다
수행자는 타율에 따라 규율로 마음을 다스린다
깨달은 이는 스스로 깨우쳐 마음에서 규율이 나온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이는 타율에 따라 온갖 궁리를 한다
지혜로운 이는 마음의 규율에 따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한다
도를 깨닫는 것이란 곧
가라앉힘
축적
사색과 물음
부처
깨달음
깨달을 수 있으나 닦아 만들 수는 없다
《수행과 깨달음 입문: 방법과 여섯 원칙》 수행과 깨달음을 시작할 때 어디에 힘을 써야 하며 어떤 집착을 경계해야 하는가?
어떻게 닦고 깨달을 것인가
이 큰일의 인연을 논하자면 누구나 본래 갖추었고 저마다 이미 이루어져 털끝만큼도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시작 없는 겁 이래 애착의 뿌리와 씨앗, 망상과 감정, 생각의 습기에 깊이 물들어 오묘한 밝음이 가려졌으므로 참되게 누리지 못한다. 늘 몸과 마음, 세계에 대한 망상의 그림자 속에서만 살아가므로 생사를 떠돈다. 부처와 조사가 세상에 나와 수많은 말과 방편으로 선과 가르침을 설한 것은 모두 근기에 맞추어 집착을 깨뜨리는 도구일 뿐, 본래 남에게 줄 실재하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수행이라 하는 것은 다만 자기 마음을 따라 망상과 습기의 그림자를 깨끗이 없애고 여기에 힘쓰는 것이기에 수행이라 한다. 한 생각의 망상이 문득 쉬어 자기 마음을 철저히 보면 본래 원만하고 밝으며 넓고, 본디 청정하여 아무것도 없다. 이를 깨달음이라 부른다. 이 마음 밖에 따로 닦거나 깨달을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본체는 거울 같고 망상으로 인연을 붙드는 그림자는 참마음의 먼지와 때일 뿐이다. 그러므로 생각의 형상은 먼지이고 분별의 감정은 때라 한다. 망념이 녹으면 본체가 저절로 나타난다. 거울을 닦아 때가 없어지면 밝음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법은 본래 이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오랜 겁에 걸쳐 물든 습기가 굳고 나에 대한 애착의 뿌리가 깊어 뽑기 어렵다. 이번 생에 다행히 본래 갖춘 반야가 안에서 스미는 것을 원인으로 삼고, 밖에서는 선지식의 이끌림을 인연으로 삼아 본래 지녔음을 스스로 알고 마음을 내어 뜻을 향하며 생사에서 벗어나려 한다. 무량한 겁 이래 생사의 뿌리를 한꺼번에 뽑으려는 일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큰 힘을 지닌 사람이 맨몸으로 짊어지고 단칼에 곧장 들어가지 않으면 참으로 어렵고도 어렵다. 옛사람이 한 사람이 만 명을 상대하는 것과 같다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다.
수행과 깨달음에 착수할 곳
대체로 말법에는 수행하는 사람이 많아도 참된 효용을 얻는 사람은 적고, 힘을 쓰는 사람은 많아도 힘을 얻는 사람은 적다. 왜인가? 바로 착수할 곳을 찾지 못하고 이전에 듣고 보고 이해한 말 위에서 분별과 감정으로 헤아리며 망상을 억누르고 빛과 그림자의 문턱에서 공부하기 때문이다. 옛사람의 오묘한 말을 먼저 가슴에 품고 실재하는 법으로 여기며 자기 지견으로 삼지만, 여기서는 조금도 쓸모없음을 모른다. 이것이 남에게 의지해 이해를 만들고 자신의 깨달음 문을 막는 것이다.
이제 공부하려면 먼저 알음알이를 깎아 내고 오직 한 생각에 힘써야 한다. 자기 마음이 본래 깨끗하여 실오라기 하나 걸리지 않고 원만하고 밝아 법계에 가득함을 참으로 믿어야 한다. 본래 몸과 마음과 세계도 없고 망상과 감정, 생각도 없다. 바로 이 한 생각은 본디 생겨남이 없으며, 눈앞의 온갖 경계는 모두 허망하여 실재하지 않고 참마음에 나타난 그림자일 뿐이다. 이처럼 꿰뚫어 보면 망념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곳을 뚫어지게 보아, 어디서 일어나 어디로 사라지는지 살핀다. 이렇게 힘껏 밀어붙이면 어떤 망념이든 산산이 부서져 그 자리에서 얼음 녹듯 무너진다. 절대로 그것을 따라 흘러가지 말고 이어지게 두지도 마라. 영가가 이어지는 마음을 끊어야 한다고 한 것이 이것이다. 허망하게 뜬 마음은 본래 뿌리가 없으니 실재하는 일로 여겨 가슴에 가로놓아서는 안 된다. 일어나면 곧 꾸짖고 한 번 꾸짖으면 사라진다. 억누르면 오히려 물 위의 조롱박처럼 그것에 부림을 받으니 절대로 억누르지 마라. 몸과 마음과 세계를 한쪽으로 제쳐 두고 오직 이 한 생각을 들어라. 허공을 가르는 보검처럼 부처든 마귀든 어지러운 실을 베듯 모두 베어 끊고, 온 힘으로 밀어붙여 나가라. 이것이 곧은 마음으로 진여를 바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바른 생각은 생각 없음이다. 생각 없음을 관할 수 있다면 부처의 지혜로 향한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수행의 마음을 낼 때는 유심의 법문을 참으로 믿어야 한다. 부처는 삼계는 오직 마음이고 만법은 오직 식이라 하였다. 그 많은 불법은 이 여덟 글자를 풀이하여 누구나 확실히 믿게 하는 것일 뿐이다. 성인과 범인의 두 길도 오직 자기 마음속의 미혹과 깨달음이라는 두 길이다. 모든 선악의 인과는 이 마음 밖에서 한 조각도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오묘한 본성은 천연하여 본래 깨달음에 속하지 않으니 어찌 미혹될 수 있겠는가? 지금 미혹이라 함은 자기 마음이 본래 아무것도 없고 몸과 마음과 세계가 본래 공함을 알지 못하여 그것에 막히는 것일 뿐이다. 늘 망상으로 생멸하는 마음을 참으로 여기므로 여섯 감각 대상의 경계와 인연, 온갖 환화를 실재로 인정한다. 이제 마음을 내어 나아감은 흐름을 거슬러 위로 향하는 한 수다. 이전의 알음알이를 온전히 벗어 버려야 하며 어떤 지견이나 교묘한 방법도 쓸모없다. 다만 눈앞의 자기 몸과 마음과 세계를 한눈에 꿰뚫어, 모두 자기 마음에 나타난 뜬빛과 환영이며 거울 속 형상, 물속 달과 같음을 보아라. 모든 소리를 나무 사이로 지나는 바람처럼, 모든 경계를 허공에 뜬 구름처럼 관하라. 모두 변하는 환상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외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망상과 감정, 생각, 모든 애착의 씨앗과 습기, 번뇌도 모두 허망한 환화로 실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깊이 관하여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반드시 그 행방을 살펴야 한다. 쉽게 놓아주지도 말고 속지도 마라. 이렇게 공부해야 조금이나마 진실에 가까워진다. 그 밖에 현묘한 지견이나 교묘한 방법을 끌어와 맞추는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공부한다는 말도 부득이한 것이다. 군사를 쓰는 것과 같으니 군사는 상서롭지 못한 도구로 부득이해서 쓴다. 옛사람이 참선하며 화두를 들라 한 것도 모두 부득이해서다. 공안은 많지만 염불하며 실상을 살피는 화두는 세속의 고달픔 속에서 특히 힘을 얻기 쉽다. 힘을 얻기 쉬워도 문을 두드리는 기왓장과 같아 결국 버려야 한다. 다만 한 번 쓰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이제 이것으로 공부하려면 굳게 믿고 확실히 의지하며 단단히 붙들어야 한다. 결코 망설이거나 오늘은 이러고 내일은 저래서는 안 된다. 깨닫지 못할까 두려워하거나 현묘하지 않다고 싫어하는 이런 헤아림은 모두 장애다. 미리 밝혀 두어 그때 의심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공부에서 힘을 얻으면 바깥 경계는 들어오지 않지만 마음속 번뇌가 느닷없이 들고일어나기도 한다. 욕망이 치솟거나 답답함이 생기고 온갖 장애가 일어나 마음과 힘이 지쳐 어쩔 도리가 없어진다. 이는 제팔식에 무량한 겁 동안 간직한 습기의 씨앗들이 오늘 공부에 몰려 모두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분명히 알아야 한다. 먼저 알아보고 꿰뚫어 지나가야 하며 절대로 그것에 덮이거나 놀아나거나 실재하는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정신을 떨쳐 용맹하게 분발하고 본래 참구하던 화두를 들어 이런 생각이 일어나는 곳을 끝까지 쫓아가라. 내게 본래 이런 일이 없는데 어디서 왔는지, 도대체 무엇인지 물어 반드시 그 행방을 보아라. 이렇게 밀어붙여 귀신도 울며 자취를 감추게 하고, 기어이 모조리 몰아내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마라. 이처럼 힘쓰면 저절로 좋은 소식을 볼 것이다.
한 생각을 밀어붙여 깨뜨리면 모든 망념이 한꺼번에 떨어져 나간다. 허공 꽃의 그림자가 지고 아지랑이의 물결이 맑아지는 것과 같다. 이 고비를 넘으면 무량한 가벼움과 편안함, 무량한 자유를 얻는다. 이는 초심에서 힘을 얻는 곳으로 현묘한 일이 아니다. 가볍고 편안하며 자유로워져도 기뻐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 된다. 기쁨을 내면 기쁨의 마가 마음에 붙어 또 하나의 장애가 된다. 장식 속 습기와 애착의 씨앗이 깊고 굳게 숨어 화두의 힘이 닿지 않고 마음을 관하는 빛도 미치지 않아 스스로 손댈 수 없다면 부처에게 예배하고 경을 외며 참회해야 한다. 또 은밀히 진언의 심수를 지녀 부처의 밀인에 의지해 없애야 한다. 모든 밀주는 부처의 금강심인이니 우리가 쓰면 금강 보배 방망이를 쥐고 모든 것을 부수어 티끌로 만드는 것과 같다. 예로부터 부처와 조사가 전한 심인의 비결도 이 밖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방의 여래가 이 진언의 심수를 지녀 위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한다. 부처는 분명히 말했으나 조사 문하에서는 보통 감정에 떨어질까 염려하여 비밀로 하고 말하지 않았을 뿐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날마다 정한 공부가 있어야 하며 오래 익숙해지면 큰 힘을 얻는다. 다만 신묘한 감응을 바라서는 안 된다.
이해의 깨달음과 체득의 깨달음
수행하는 사람 중에는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이도 있고 먼저 닦고 뒤에 깨닫는 이도 있다. 그러나 깨달음에는 이해와 체득의 차이가 있다.
부처와 조사의 가르침에 의지해 마음을 밝히는 것은 이해의 깨달음이다. 대개 지견에 떨어져 모든 경계와 인연에서 힘을 얻지 못한다. 마음과 경계가 맞서 하나로 융합되지 못하고 닿는 곳마다 막혀 장애를 많이 만든다. 이를 비슷한 반야라 하며 참된 참구는 아니다.
체득의 깨달음은 자기 마음속에서 소박하고 진실하게 공부하여 산과 물이 다하는 곳까지 밀어붙이다가 갑자기 한 생각이 쉬어 자기 마음을 철저히 아는 것이다. 네거리에서 친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더 의심할 것이 없고, 물을 마신 사람이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알듯 남에게 말로 드러낼 수도 없다. 이것이 진실한 참구와 실제 깨달음이다. 그 뒤 깨달은 자리로 마음과 경계를 융합하고 현재의 업과 흐르는 식, 망상과 감정, 생각을 깨끗이 없애 모두 한맛의 참마음으로 녹인다. 이것이 체득의 깨달음이다.
이 체득에도 깊고 얕음이 있다. 근본에서 공부하여 제팔식의 틀을 깨고 무명의 굴을 단번에 뒤집어 한 번 뛰어 곧장 들어가면 남는 법이 없다. 이는 가장 뛰어난 근기로 체득이 깊다. 그 밖에 점차 닦는 이의 체득은 얕다.
가장 두려운 것은 조금 얻고 만족하는 것이며 빛과 그림자의 문턱에 떨어지는 것을 특히 경계해야 한다. 제팔식의 근본을 깨지 못하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모두 식신 곁의 일이다. 이를 참으로 여기면 도둑을 자식으로 인정하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사람이 참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예전부터 식신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며, 무량한 겁 이래 생사의 근본을 어리석은 이가 본래의 사람으로 여긴다고 했다. 이 관문은 반드시 뚫고 지나가야 한다.
문득 깨닫고 점차 닦는다는 것은 먼저 철저히 깨달았지만 습기가 있어 단번에 깨끗이 없애지 못함을 말한다. 모든 경계와 인연에서 깨달은 이치로 관조의 힘을 일으켜 경계를 겪으며 마음을 시험한다. 경계를 한 몫 녹이면 법신을 한 몫 체득하고, 망상을 한 몫 없애면 본래 지혜가 한 몫 드러난다. 이 또한 온전히 촘촘한 공부에 달려 있으며 경계 위에서 해내야 더욱 힘을 얻는다.
수행과 깨달음의 여섯 원칙
근기가 예리하고 믿음이 용맹한 이가 수행하며 기꺼이 공부하면 현상의 장애는 없애기 쉬워도 이치의 장애는 버리기 어렵다. 그 병통을 몇 가지 간략히 든다.
첫째, 현묘함을 탐하여 구하지 마라
이 일은 본래 평탄하고 실제적이며 한결같이 평범할 뿐 현묘함이 없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깨달아도 깨닫기 전과 같아 여전히 옛사람이지만 예전처럼 행하는 자리는 아니라고 했다. 더는 현묘함이 없고 공부가 익으면 자연히 평범하고 참되다. 우리의 알음알이와 습기가 깨끗해지지 않아 안에서 반야에 스미고, 반야가 습기에 물들어 온갖 환화를 일으키며 교묘한 견해를 많이 만들어 마음에 얽히면 현묘하다고 여겨 깊이 빠져 놓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식신의 그림자 같은 밝음이며 분별과 망견의 뿌리로, 견해의 가시라고도 한다. 이전의 거칠고 뜬 망상과 달리 미세하게 흐르는 생멸이며 지혜의 장애라고도 하여 올바른 지견을 가로막는다. 이를 참으로 인정하면 온갖 미친 견해가 일어나니 가장 경계해야 한다.
둘째,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지 마라
우리의 오묘하고 원만한 참마음은 본래 상대를 떠났다. 이전에는 망상이 엉겨 마음과 경계, 감각기관과 대상이 서로 맞서므로 미혹을 일으키고 업을 지었다. 이제 수행자는 한 생각으로 몸과 마음과 세계를 내려놓고 오직 이 한 생각을 들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깨닫고 못 깨닫고를 상관하지 말고 생각마다 걸음마다 공부해 나가라. 공부가 무르익으면 저절로 본래면목을 볼 텐데 어찌 미리 따지겠는가? 마음을 가지고 깨달음을 기다리면 바로 그 기다리는 마음이 생사의 뿌리다. 겁이 다하도록 기다려도 깨닫지 못한다. 상대를 떠난 참마음을 알지 못해 따로 무언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마음을 없애지 않으면 쉽게 지치고 싫증나 물러난다. 물건을 찾다 보이지 않으면 그만두려는 생각이 드는 것과 같다.
셋째, 오묘한 과보를 바라지 마라
중생의 생사하는 망심은 원래 여래의 결실인 본체다. 지금 미혹 속에서 부처들의 신통하고 오묘한 작용을 망상과 감정, 생각, 분별과 지견으로 바꾸고, 참되고 깨끗한 법신을 생사의 업질로, 청정한 묘토를 여섯 감각 대상의 경계로 바꾸었다. 이제 공부하여 한 생각에 자기 마음을 문득 깨달으면 큰 대장간의 붉은 화로가 만상을 녹이는 것과 같다. 이 몸과 마음과 세계가 원래 여래의 결실인 본체이며 이 망상과 감정, 생각이 원래 신통하고 오묘한 작용이다. 이름을 바꾸어도 본체는 바꾸지 않는다. 영가는 무명의 참된 성품이 곧 불성이고 환화한 빈 몸이 곧 법신이라고 했다. 이 법문을 깨달으면 취하고 버리는 감정을 잊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쉬어, 걸음마다 화장정토이고 마음마다 미륵이 내려온다. 마음을 두고 먼저 오묘한 과보를 구하면 바로 그 바라는 마음이 생사의 근본으로 바른 지견을 막는다. 구할수록 멀어지고 구하는 힘이 지치면 싫증이 생긴다.
넷째, 스스로 의심과 염려를 만들지 마라
공부하며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보고 듣고 아는 감각을 끊으며 옛 걸음을 벗으면 앞은 아득하여 몸을 편히 하고 삶을 세울 곳이 없다. 나아가도 새로운 체득이 없고 물러나면 옛 거처를 잃는다. 앞뒤를 헤아리면 의심이 생겨 끝없는 궁리로 득실을 따지고, 별도의 억측이나 사악한 생각을 일으켜 바른 지견을 막는다. 이를 꿰뚫어 보고 단호히 곧장 들어가 다시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대체로 공부하다 더 할 수 없는 곳이 바로 힘을 얻는 곳이다. 더욱 정신을 내면 물러서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근심의 마에 떨어진다.
다섯째,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지 마라
공부의 염력이 간절하여 망상을 몰아붙여 한 생각이 문득 쉬면, 갑자기 몸과 마음이 공하게 벗겨지고 대지에 한 치 땅도 없이 끝없이 깊음을 보아 크게 두려워한다. 여기서 꿰뚫어 보지 못하면 감히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혹은 이 툭 트인 공을 뛰어나고 오묘한 것으로 여긴다. 이 공을 참으로 인정하면 큰 사견이 일어나 인과를 없다고 부정한다. 이곳이 가장 위험하다.
여섯째, 자기 마음이 부처임을 확실히 믿어라
부처는 따로 있는 부처가 아니라 오직 마음이 곧 그것이다. 부처의 참 법신은 허공과 같다. 망상이 원래 비었음을 알면 본래 있는 법신이 저절로 드러나 밝고 고요하게 비추며 원만하고 두루하여 부족함도 남음도 없다. 더는 마음을 밖으로 달려 구하게 하지 마라. 이 마음을 버리고 따로 구하면 마음속에 한량없는 꿈의 경계가 온갖 모습으로 변해 일어난다. 이는 식신이 변화해 나타난 것이니 특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청정한 마음속에는 본래 아무것도 없고 한 생각도 없다. 마음을 내고 생각을 일으키면 곧 법의 본체를 어긴다.
지금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망상이 본래 허망함을 모르고 망상을 잘못 실재로 여겨 오로지 맞서 싸우려 한다. 어린아이가 등불의 그림자와 노는 것과 같아 놀수록 관계가 없고 오래 놀면 스스로 두려워진다.
또 망상을 두려워하여 한 움큼 잡아 한쪽으로 던져 버리고 싶어 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바람을 잡고 그림자를 붙드는 것과 같아 온종일 뒹굴며 싸우다 힘을 다하고 한 생각도 쉴 때가 없다. 오랫동안 얽히면 믿음은 날로 지쳐 참선은 효험이 없다고 말하며 비방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물러서는 마음을 낸다. 초심자의 공통된 병이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늘 머무는 참마음과 불생불멸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망상을 실제 성품과 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곳은 반드시 뚫고 지나가야 한다. 이 관문을 통과하려면 위로 향하는 길이 따로 있다. 마음과 뜻과 식을 떠나 참구하고 망상의 경계를 떠나 구하기만 하면 된다. 한 생각이 일어나면 선이든 악이든 곧바로 제쳐 두고 절대로 맞서지 마라. 자기 마음속에는 본래 이런 일이 없음을 참으로 믿어라. 본래 참구하던 화두를 힘껏 들어 금강 보검처럼 마귀든 부처든 모두 휘둘러 베어라. 여기서는 큰 용맹, 큰 정진, 큰 인내의 힘이 가장 필요하다. 앞뒤를 계산하거나 겁내고 약해져서는 안 된다. 곧은 마음과 바른 생각으로 몸을 일으켜 앞으로 나아가면 저절로 우뚝하고 당당하여 이런 망상에 얽히지 않는다. 사냥꾼의 팔을 벗어난 매처럼 온종일 모든 경계와 인연에서 저절로 방해받지 않고 큰 가벼움과 편안함, 큰 자유를 얻는다. 이것이 초심의 첫걸음 공부에서 힘을 얻는 곳이다.
위의 몇 조목은 뱀을 그리고 발을 덧붙이는 것과 매우 비슷하며 한때의 방편인 말일 뿐이다. 본래 궁극도 아니고 실재하는 법도 아니다. 길가에서 문밖으로 한 걸음 나가다가 차별된 갈림길에 빠져 헛되이 마음과 힘을 쓰고 시간을 잃을까 염려해서다. 반드시 참된 한 문을 통해 오묘하게 장엄한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른바 걸음이 바르고 평탄하여 빠르기가 바람 같으니, 그 걸음은 하루와 겁을 배로 견줄 수 있다.
요컨대 부처와 조사의 위로 향하는 한 길은 일정한 노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초심의 방편에서도 이곳을 꿰뚫고 지나야 비로소 가능하다.
《마음을 닦는 것이 운명을 닦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돌아보며 삶의 득실과 관계를 어떻게 새롭게 이해할까?
마음을 닦는 것이 운명을 닦는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일은 과거 덕행이 돌아온 것이다. 전생과 후생은 없고 현생만 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없고 생명은 삶을 체험할 뿐이다. 곁의 사람을 잘 사랑하며 행복감을 찾아라
마음을 닦는 모든 내용이 여기에 있다
내 마음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이 내 마음이다
원망은 곧 고통이다
감사는 곧 행복이다
탐욕이 없으면 속임이 어디서 오겠는가
사심이 없으면 마음의 상처가 어디서 오겠는가
인과로 과거를 보고
도의로 현재를 보라
믿음 신뢰 신념 신앙
1. 믿음(believe): 어떤 관점, 이념, 사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은 객관적 사실이나 경험에 따른 판단으로, 이성과 증거를 기반으로 할 수도 있고 개인의 신념이나 감정적 경험에 근거할 수도 있다.
2. 신뢰(trust): 어떤 사람이나 조직의 신뢰성, 성실함, 충성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뢰는 상호 존중과 정직, 책임에 바탕을 둔 관계로, 서로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토대로 세울 수 있다.
3. 신념(belief): 어떤 이념, 가치관, 도덕 원칙을 굳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념은 내적 경험과 인식을 바탕으로 한 관념으로, 종교적 믿음, 도덕 관념, 문화 전통 등이 될 수 있다.
4. 신앙(faith): 어떤 신, 신앙 체계, 종교적 믿음을 굳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신앙은 믿는 이의 마음과 영성에 바탕을 둔 느낌으로, 종교적 믿음, 인생 철학, 가치 관념 등이 될 수 있다.
성실과 신뢰, 맑은 마음, 편안한 마음, 장인의 마음, 만족스러운 마음, 즐거운 마음, 홀가분한 마음, 열정적인 마음, 자신감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라. 세상에서 진정으로 소중한 것은 흔히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인생의 진실은 성취와 영예를 얻는 데만 있지 않고 다음 역으로 계속 나아갈 용기에 있다.
크게 깨달은 사람, 크게 자유로운 사람이 곧 부처다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의 차이》 나의 규율은 외부에서 오는가, 내면의 자각에서 오는가?
어리석은 이는 타율에 따라 온갖 궁리를 하고
지혜로운 이는 마음의 규율에 따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한다
《어떻게 즐거워질까》 자기답게 살고 가치 있는 일을 이루며 어떻게 기쁨과 자신감을 얻을까?
자기답게 살 때 가장 즐겁고
해냈을 때 가장 자신 있다
자신감은 누구도 미치지 못하는 독특한 일이 네게 있는 데서 나온다
그 일은 세상 사람에게 가치 있고 필요한 일이기도 해야 한다
《수행과 깨달음》 행동의 수련과 내면의 깨달음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부처
깨달음
수행은 부처가 되기 위한 것으로 구함에 있다
깨달음은 본성을 밝히는 것으로 앎에 있다
수행은 행동으로 본성을 다스린다
깨달음은 본성으로 행동을 펼친다
깨달은 이는 스스로 깨우쳐 마음에서 규율이 나온다
수행자는 타율에 따라 규율로 마음을 다스린다
도를 깨닫는 것이란 곧
가라앉힘
축적
사색과 물음
부처
깨달음
깨달을 수 있으나 닦아 만들 수는 없다
《수행》 내가 이해하는 수행은 정말 행동과 곁의 사람들에게 닿아 있는가?
진정한 수행은 행동으로 닦는 데서 나온다.
“부처의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부처를 믿는 것보다 중요하다.
세상 밖에 고인은 없다. 세상을 떠나면 고인도 없다. 생명을 닦는 것이 아니라 삶을 체험할 뿐이다.
꿰뚫어 보고 미련까지 끊으면 “마음이 죽고”, 꿰뚫어 보되 미련까지 끊지 않는 것은 “지혜”다.
만족하지 않되 족함을 알면-행복
만족하되 족함을 모르면-고통
곁의 사람을 잘 사랑하며 행복감을 찾아라
《깨달음》 남의 사상을 배우면서 자신의 판단을 지키고 타인을 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독립을 배우고 널리 구제하는 법을 배워라
많은 사람이 사상은 진리를 찾는 데 쓰인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남의 사상 아래서 옳고 그름을 다툰다.
많은 사람이 지식과 사상 앞에서 자기를 잃는다.
한 글자로 “미혹”이다!
미혹이란 무엇인가? 남의 사상 아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남의 사상 아래 살며 옳고 그름을 다투고 몸과 마음과 영혼이 외부에 통제된다.
크게 이루는 사람은 자신의 독립적인 사상을 만들어 중생을 널리 구제한다. 내 마음이 움직일지는 내가 결정한다.
부처는 깨달은 사람이다. 네가 깨닫는 그 순간 너는 부처다. 깨달을 뿐 아니라 독립적인 사상을 만들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있다면 부처의 주인이 된다.
부처를 공경하고 배우고 닦되 부처를 맹신하지 않는다.
재물신을 공경하고 배우고 닦되 재물신에 미혹되지 않는다.
크게 이루는 사람은 사상을 초월하고 사상 위에 서서 사상을 만들고 사용한다. 자기를 강하게 하여 오직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고, 독립적인 사상으로 남의 성장을 도우며, 만물의 에너지를 자신을 위해 쓴다.
《경험의 속박에서 벗어나다》 과거의 경험은 언제 미지의 탐구를 가로막기도 하는가?
고수하는 데서 벗어나라.
많은 사람이 과거 경험을 근거로 문제를 판단한다. 그런데 우리가 가는 길은 알려진 길인가, 미지의 길인가? 왜 중국 영화는 대부분 사극이고 서양 영화는 공상과학인가? 모두 사고의 초점에서 비롯된다.
보통 사람은 과거 경험에 묶이고, 크게 이루는 사람은 과거 경험을 덜어 내며 미지를 탐구한다.
보통 사람은 과거를 보며 오늘을 걷고, 크게 이루는 사람은 미래를 보며 현재를 산다.
《성격에서 벗어나다》 다양한 상황에서 나는 성격을 활용하는가, 성격의 지배를 받는가?
성격에서 벗어나라.
보통 사람은 성격에 갇혀 있지만 크게 이루는 사람은 큰 판을 마음에 두기에 정해진 성격이 없다. 성격에 휘둘리지 않고 성격을 초월하며 성격 위에 서서 성격을 사용한다. 지금 필요한 성격을 드러낸다. 고정된 성품도 나도 형상도 없이, 어떤 장에 들어가든 그에 맞는 모습을 드러낸다.
《행동을 닦고 본심을 깨닫다》 행동을 바로잡으면서 그 뒤의 마음과 생각도 보고 있는가?
수행은 행동을 계속 바로잡는 것이고 깨달음은 행동 뒤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삶에서 깨달음을 검증하다》 이미 이해했다고 여기는 이치는 구체적인 일의 검증을 견딜 수 있는가?
깨달음은 생활과 관계로 돌아와 구체적인 일의 검증을 견뎌야 한다.